농심이 썩어간다는 말이 피부에 딱 와 닿는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적어도 곡식과 과수 농사에 매우 중요한 기간인 7~8월 동안은 일주일 중 하루만 비가 20~40mm쯤 내리고 나머지는 맑은 날이 되풀이 되었더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만 그와는 거꾸로 한달 중 며칠 빼고는 내내 비가 내려서, 이곳의 올해 누적강수량은 예년의 2배를 넘었다고 합니다.
비가 너무 자주 내리면 대표적으로 고추가 탄저병을 비롯한 병해충의 피해를 입게 됩니다. 보통 5월에 본 밭에 정식을 해서 7월부터 붉은 고추를 따서 말리고 빻아서 파는데 6월말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8월내내 습기 찬 날씨이다 보니 우리 마을에서 고추를 심은 농가 30여 가구 중에 탄저병 피해를 입지 않은(또는 약간 피해) 가구는 저를 포함하여 4가구뿐입니다. 저처럼 비가림을 했거나, 다른 3가구처럼 비가 오는 중에도 수시로 탄저병 예방약을 살포했기에 피해를 면한 것이겠지요. 아마 다른 지역의 고추농가도 비슷할 것으로 보입니다 벌써 건고추 가격이 작년의 3배에 육박한다고 하니, 소비자들은 다가오는 추석과 김장시즌이 되면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것입니다.
저는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무농약 무제초 무비료 무비닐 무기계 농법으로 약 30여 종의 작물을 키우고 있는데요, 올해는 그 많은 강수량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비해서 작황은 대단히 좋은 편입니다. 완전 초짜였던 작년의 실력에 비한다면야 당연한 결과겠지만 무엇보다 땅이 점점 본연의 생명력을 회복하고 있다는 점을 으뜸으로 칩니다. 작년에는 보이지 않던 뱀도 논에 출현해서 어딘가에서 돌아다니고 있고, 밭에는 참개구리(멸종위기동물)와 메뚜기, 사마귀, 처음 보는 새와 심지어는 너구리까지 돌아다니고 있답니다. 그만큼 그들이 먹고 살만한 환경이 갖춰졌다는 반증이겠지요. 뱀과 너구리는 저를 긴장케 하는 녀석이라서 밭에 나갈 때 무장(?)을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우리 밭이 빠른 속도로 진정한 자연농원이 되어가고 있다는 마음이 들어서 뿌듯합니다.
‘썩지 않는 사과’로 유명한 일본의 기무라 아키노리氏는 무농약 무비료를 시작한지 9년만에 적으나마 자연재배 사과수확에 성공했다고 하는데, 제 밭의 배는 겨우 2년만에 복숭아만 한 것을 수확하고 있습니다. 우리 밭 남쪽 마을길가로 10여그루의 배나무가 심겨져 있습니다. 작년에는 적성병과 흑성병으로 잎이 죽어버려서 열매가 한 개도 열리지 않기에 그 해 겨울에 배나무를 붙잡고 협박(?)을 했습니다.
‘느그덜! 엉아가 무지 성질 급한 거 알지? 내년까지만 지켜 보겠어. 또 올해 같은 꼬라지 되면 죄다 베어 버릴겨’ 라고요^^;; (아키노리씨는 800여그루의 사과나무를 일일이 부여잡고는 ‘열매 안 열려도 좋으니 나무야 제발 살아만 다오’ 라고 부탁했다지요?) 행여나 마을 주민들이 몰래 제 밭에 농약을 살포할까 싶어서 미리 엄포를 놓기도 했었고, 배나무 주변의 풀들을 모두 베고 모아둔 제 오줌을 섞어 오래 삭혔다가 거름으로 뿌려주었습니다. 제 협박 때문이었는지, 제 오줌의 영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 그루 빼고는 올해는 제 때 꽃도 피고 일부 잎들은 병에 걸렸지만 현재 약 200여개의 배가 주렁주렁 열려있습니다. 며칠 전 아내가 그 중 큰 것 여남은 개를 따서 깎아먹었는데 마트에서 개당 5천원씩 파는 배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이 단물도 많고 식감이 좋았습니다. 아마도 아키노리씨의 사과도 이런 것이려니 싶었습니다.
벼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10월 벼를 수확하면서 나온 볏짚(거름효과)과 왕겨 쌀겨 등을 썰어 넣고 숯가루(살균효과)와 맥반석(지력증진)을 뿌리고, 비료를 대체할 녹비작물로서 헤어리베치(질소거름) 종자를 파종하여 그것만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이삭이 나오는 시기는 다른 논에 비해서 일주일 가량 늦었지만 이삭의 상태는 가장 좋아 보인다고 합니다. 제초를 위해 왕 우렁이도 넣었지만 이 녀석들이 작년처럼 일은 하지 않고 교미만 하느라 분홍색 알만 잔뜩 벼에 붙여놓고 있습니다. 남(우렁이) 해야 일을 내가 대신 하느라 비를 맞아가며 피사리를 할 때만큼은 기분이 썩 좋지가 않습니다.
위와 같이 자연재배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되면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첫해에는 맥반석, 참숯가루, 제오라이트, 고토석회 등을 투입하느라 꽤 많은 비용이 들어갔습니다만 그 다음부터는 자연에 맡기므로 길게 보면 비료비용이 절약되고 어지간한 해충도 초기에만 발생하다가 즉시 천적에 의해서 진압(?)되곤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제가 먹고 싶지는 않은 풀들이 농사의 큰 장애물일텐대, 올해부터는 마음을 바꾸어 풀은 장애물이 아니라 자연재배를 위한 동반자로 여기니까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둑새풀, 바랭이, 돌피 같은 것은 부득이 초기에 뽑아주지만 다른 것들은 어느 정도 자라게 하다가 낫으로 베어 도로 그 자리에 깔아주면 이것들이 미생물과 벌레들의 서식지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토양의 습도조절도 해주고 썩으면 훌륭한 거름이 되지요.
이런 환경에서 자란 작물을 먹는 것이 사람 몸에 좋을까요? 아니면 농약과 제초제, 화학비료로 키운 작물이 좋을까요? 당연히 전자가 좋습니다만 이런 방식으로는 대량생산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 땅의 기준으로는 겨우 서너 가구만 먹을 수 있을 정도일 겁니다. 후자의 방식으로 하면 1 농가가 20가구 이상을 먹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사를 지었으므로 농약과 기계 없이도 식량자급이 되었지만 지금은 농약과 비닐, 석유, 기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심해지는 탈농도시화는 우리 소득을 증대시켜주고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긴 합니다만 먹거리만큼은 퇴보시켰다고 봐야 합니다. 그나마 유기농법이 지속 가능한 대안으로 제기됩니다만 유기농법 또한 아직은 비닐과 기계의존, 질산태질소의 부작용문제는 해결을 못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만, 때가 되기 전까지는 제가 키운 농산물을 여러분에게 팔 생각은 없습니다. 팔만한 물량도 되지 않거니와 각고의 정성과 노력이 들어간 자식 같은 녀석을 도시인들이 매긴 헐값으로 넘길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여러분들께 당부해드리고 싶은 것은 가급적이면 수입산 보다는 국내산 농산물을, 기왕이면 친환경농산물을, 좀더 여유가 있다면 자연재배농산물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을 해야 국내의 절대다수 가난한 농부들이 그나마 농사를 이어갈 수 있고, 땅심이 죽지 않을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농촌이 다시 활성화 되어서 더 많은 소비자들이 생명력 충만한 먹거리를 값싸게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당부에서 딴지를 거는 분은 주머니 사정을 얘기할 것입니다만 대개의 경우는 제게 씨알도 안 먹히는 딴지입니다. 제 말대로 4인가족이 친환경 이상으로만 먹거리를 구입한다고 했을 때 실제로 추가 지출되는 부분은 월 10~15만원입니다. 이만큼의 돈이 부담된다는 것은 극빈자들이나 해볼 수 있는 말입니다. 수천 만원 하는 자가용을 굴리고 외식하는 비용, 휴대폰 등 통신비용, 술과 담배,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놀러 다니는 비용, 철마다 사는 의류비, 삼시세끼 외의 군것질 비용 등등 썩어 나가는 돈을 조금만 아끼면 얼마든지 제 당부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위의 것들은 없어도 생명과 건강에는 지장 없습니다만, 먹거리 안전문제는 우리모두의 인식을 바꾸어서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들의 건강을 잃게 되거나 나아가서는 그나마 26%뿐인 국내식량자급률마저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재테크의 측면에서도 당장은 값싸고 보기 좋은 것이 유리해 보이겠지만 조금만 멀리 보면 저질먹거리로 인한 의료비 지출과 먹거리 수입증가에 따른 푸드마일리지 증대, 어쩌면 몇 년 후에는 쌀 한 가마에 100만원, 고춧가루 한 근에 10만원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오전에 황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장님의 동생)이 왠 종이를 건네면서 다짜고짜 날인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내용인지 상세히 말씀해주시면 판단해서 날인하겠다고 했더니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마을에서 정한 것이니 그냥 하라면 하지 왜 따지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날인하라는 것은 마치 4년 전 어르신께서 이명박이 어떤 인간인 줄도 모르면서 무조건 찍으라고 강요당했던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서 어르신도 이제 와서 후회가 많잖습니까?’
라고 대꾸했더니 처음으로 제게 험한 말을 하시면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그 집의 마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마무리는 잘 되었습니다만, 농촌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할 것 같습니다. 중립적이고 젊은 사람이 없으니 중요한 마을 사업이 분별없이 결정되기도 하고, 친환경농법이나 장기적으로 꼭 해야 할 일들을 진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마을 한복판에서 전통자연재배방식의 농사를 지으면서 버텨내는 제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네요.^^
이번 주말에는 산에 올라 도라지를 캐러 가야겠습니다. 지난 여름에 운 좋게 산삼을 몇 개 캔 이후에는 도통 성과가 없어서 좀 겸허하게(?) 수준을 낮추어 산도라지와 더덕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주말이면 돈도 안 들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게끔 가족과 함께 산야초 수색을 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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