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이카페에서 공부가 많이 되었고 지인도 생기고 제자들도 생겼다. 나자신 재테크에 관해 난생처음 글을 쓴것이었다.
많은 분들이 메일을 보내고 공감한다고 또는 감사하다고 한것에 보람과 기쁨을 느끼고 있다.
내가 늘 주장하는 것은 단 두가지다. 평소 저축많이 해서 목돈을 만들어라. 그리고 함부로 장사(사업)해서 번돈 말아먹지 말라는 것이다. 장사를 할려면 돈을 안들이고 안 망하는 사업을 하라는 것이다.
내 여동생은 결혼할때 길동에서 전세 3500에 시작했지만 지금은 강남에 아파트 2채가지고 있고 집 시세만 20억한다.
동생부부는 재테크한적 한번도 없다. 그냥 월급받아 저축해서 살다가 1억5천짜리 일원동아파트를 전세 7천을 안고 사고 몇년후 또 또 전세안고 한채를 더산것이 전부다 물론 당시에는 강남이라도 아파트가 1억대였다. 그동안 크게 오르더니 지금은 10억씩 간것이다.
여동생은 교사고 남편은 대기업다니지만 둘다 월급장이다.
평생 주식이나 펀드등 투자를 해본적없는 사람들이다.
강남사는 친척들은 지금은 모두가 부자축에 끼지만 모두 서민출신들이고 열심히 산것이 전부였다.
된장찌게와 김치만 놓고 밥먹던 분들이다. 그냥 열심히 살았던 것이 저절로 부자가 된거지 투기나 투자는 한번도 해본적없는 분들이다.
돈을 억지로 벌려고 한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되고 한심하기 까지 하다.
우리친척들이나 주위분들이 지금은 모두가 부자가 된것은 단 하나의 이유였다.
서울에 살았기 때문이다. 서울의 집값은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음으로
자녀교육을 성공했고 모두들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났기 때문에 자식들도 잘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리지날 강원도사람들이다.
강원도는 옛날부터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주로 탄광에 일자리외에는 비탈에서 감자만 먹던 분들이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밥을 못먹고 감자나 죽을 먹고 살았다. 그래서 서울에 가서 7살때 우리집은 서울 금호동으로 이사를 와서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당시는 직장이 거의 없을때라 남자는 노가다를 많이 했고 여자는 수선집이나 양잠점을 많이 했다.
우리집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집보다 한해 먼저 올라오신 이모님은 남대문시장에서 시다로 시작해서 가게 하셔서 자식들 교육시키고 모두 결혼시키고 자식들한테 집한채씩은 모두 결혼할때 사주었고 지금은 편안한 노후를 보내신다. 큰 아파트도 있고 오피스텔도 5개가 가지고 계신다.
당시 금호국민학교는 아침반 오후반이 있던 콩나물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지금도 국민학교 동창회를 하는데 그 콩나물교실에서 의사나 나오고 판검사가 나왔다.
솔직히 말해 지금처럼 돈벌기 좋은 시대는 없었다고 본다. 지금은 식당에서 설겆이만 해도 150만원은 받는다.
이런호사가 어느시대에 있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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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조업에도 근무를 했지만 부자가 되는 것 누구나 가능하다.
생산직월급이 사무직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생산직들이 생활태도나 저축습관등이 못따라오니 같은 월급을 받고도 사는 꼬라지는 제각각이었다.
어떤놈은 잘사는데 어떤놈은 지방에서 세방사는 놈도 있었다.
같은 월급받는데 참 한심했다.
삶은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다.
그리고 배우자도 성실한 사람 만나면 금방 일어난다.
내 4촌동생 집안 벌써 형제지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혼은 몇달간격으로 했지만 외벌이 형은 한달에 고작 150벌고 작은 다세대에 전세사는데 동생부부는 맞벌이에 한달에 600만원이상을 버니 신혼집도 자기아파트 32평짜리를 사서 결혼했다.
큰놈은 3류대나왔고 작은 놈은 대학중퇴하고 대기업생산직으로 근무한다.
작은 놈이 사람이 야무지고 똑똑하다 보니 대학원나온 공무원을 물어서 결혼했으니 작은 며느리 잘받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그러데 걱정이 태산같은 것이다.
큰놈은 빈곤하게 살고 작은 놈은 풍족하게 사니 동서지간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작은어버지 작은어머니는 걱정이 태산같다고 하신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경제적인 격차가 엄청나게 확대된다는 사실이다.
동생은 1년에 7200만원씩 버니 그 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것이다. 형은 세월이 갈수록 가난에서 못벗어나고 동생은 갈수록 부유해진다는 사실이다..이걸 어떻게 해결할지 막막하다는 것이다. 동생을 보면 자랑스럽고 큰 놈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이다. 작은 어머니는 왜 대학까지 나왔는데 월급을 작게 받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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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힘들게 사는 사람이 있고 좀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나도 적은 나이가 아니고 반백년을 산 사람이다. 어느날 내 나이가 황당스럽고 한심해서 내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이제 중학생아들하고 공무원인 마누라하고 3식구인데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열심히 사니 자리가 잡히는 것은 금방이었다. 누구나 10년간 열심히 살면 자리가 잡히고 안정된다고 본다.
사람이 운명을 받아들일줄도 알고 개척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작년부터 실천하는 것이 가족여행이다. 여름에는 러시아에 다녀왔고 겨울에는 큐슈에 다녀왔다.
요즘은 또 여름방학때 어디를 가는가를 연구중이다.
지금 뉴질랜드나 터어키를 두고 고르고 있다. 여행경비는 따로 모으지는 않고 평소 아껴쓰는 돈으로 간다.
이번여행은 멀기 때문에 돈천만원은 든다고 한다. 눈딱감고 쓰면 되는 것이다.
천만원은 쓸 수있고 또 벌 수있지만 가족여행의 추억은 죽는날까지 기억되기 때문이다.
평소 아끼는 생활이 중요하다.
집을 사는 것도 계획적으로 사고 그리고 열심히 모아서 넓혀가면 큰 행복이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살면 삶이 진지해 진다.
1년내내 일만하다가 보내면 인생이 허무해 진다.
나이 40을 넘겼을때는 가족을 생각하기 바란다.
당신은 자녀를 위해 부모를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내가 20대 말이었을때 우리 부모는 나를 일본에 보냈다.
그당시는 해외여행을 거의 안갈때인데 대학을 졸업했으면 일본사회를 경험하고 오라고
나를 보낸것이다. 그래도 일본말을 어느정도 할줄 알았기 때문에 아주 힘들지는 않았다.
좋은 분들을 만났고 교제하고 일본문화를 익히는데 큰 힘이 되었다.
좀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와서 대학원에 진학한것도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이미지가 별로 않좋을때지만 많은 일본분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당시까지 여자친구한번 사귀어 본적도 없었지만 일본에서 데이트도 해보았고
눈축제구경도 했는데 영하 20도에 삿뽀르에서 얼어죽는줄 알았다.
눈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그 아름다운 풍경에 너무 좋았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雪國의 배경이기도 했다.
지금도 겨울이 되면 북해도의 대자연과 풍경이 생각난다.
우리할아버지는 북해도 이시가리 탄광에서 힘든 일을 하셨지만 손자는 비행기를 타고 호텔라운지에서 삿뽀르시내의 야경을 보면서 저녁식사를 할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던 겁니다.
앞으로 인생길을 더욱 빨라질것 같다. 세월은 잠깐 사이에 지나간다.
누구에게다 똑같은 시간이 주어지지만 삶은 노력하는 사람한테 더 큰 혜택과 기쁨을 준다.
여러분도 40살 목표, 50살 목표, 60살 목표, 70살목표라는 멋진 인생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여 행복한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21년전에 겨울 삿뽀르에서 와세다출신의 마루가와군이 파티에 초대해서 인사를 시켜주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모르지만 피부가 하얀 수줍음이 많던 아가씨였다. 몇번 식사한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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