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날 오빠들의 전화를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는데 KTX 안에서 남편이 말을 하더군요
조금전에 형님한테 전화를 받았는데..오후 5시경 돌아가셨다고..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습니다. 부모님은 제게는 하늘이거든요..
반쪽의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안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군요. 저는 임종도 보지 못했는데..
마지막으로 뵌게 설날이였거든요..아버지는 제게는 자상한 분은 아니였습니다.
하지만..저는 아버지에게 매를 한번도 맞지 않았습니다. 늘 언제나 엄마 말 잘 들어라..이렇게 말을 하시죠.
요양원에 계실때 항상 맘이 많이 아팠어요. 자식으로써 요양원에 계신다는것 만으로 가슴이 많이 아프더군요.
저는 위에 식구들과 나이차이가 많아서 저희부모님과 가장 오랫동안 같이 생활한 딸이였습니다.
결혼전에 저희 아버지가 나이드셔도 직장을 다닐때 항상 제가 좋아하는건 한박스씩 사다 줬습니다.
자두를 좋아하는데..항상 한박스씩 사 오더라구요. 제가 좋아해서 사 왔다는말 절대로 한적이 없습니다.
그냥 저렴해서 사 왔다고..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언제나 알죠..막내딸이 좋아해서 사 왔구나..
엄마한테 첫눈에 반해서 늙어죽을때까시 사랑하시면서 살더라구요..엄마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아버지가 요양원에서 아프면 죽을 끓여서 빨리 가져다 줬어요..
그래도 가는 모습은 봐야하는데..가는모습까지 못 보니..너무나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니..왜 못해준것만 그렇게 생각나는지..조금더 잘해줄걸 늘 좋아하는것 사 가서..장어를 좋아하셔서
가져다 드리면 맛나다고 드시는 모습이 눈에 생생한데..그것도 멀리사니 1년에 몇번정도밖에 못해주더군요.
늘 빨리 죽으라고 하던 엄마는.." 왜 생선 그렇게 좋아하더만..안 먹냐고..나도 조금후에 데리고 가라고..왜 너혼자..가냐고.."
울더군요..배우자를 잃은 엄마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것 같았습니다.
입관식날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을 처음 뵈었습니다. 얼굴을 쓰다듬고 " 아버지 이제 마지막이지..잘가라고..좋은데 가라고..
안아드렸습니다. 다시 나...아버지딸로 태어날께요.."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했는데 아버지 얼굴에 시체 다듬는분이.
삼베로 된 걸로..얼굴을 씌웠습니다. 마지막이라고..생각하니..무섭기도 하고..그자리에서 제가 기절을 했나 봅니다.
누군가 나를 업고써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저희 아들이 놀래서..저를 업고 뛰었더군요.
몇시간만에 눈을 떠보니..제 주위에는 남편과 조카3명 저희 얘들이 있더군요.
머리가 너무 아팠습니다. 링겔을 맞고..장례식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눈물은 왜 그렇게 나오는지..여태 아버지한테 못한것만 눈에 밟히더군요. 왜 그렇게 자식노릇을 잘하지 못했는지..
늘 내자식이 먼저고..부모는 뒷전인 나의 이기적인 모습에..참회의 눈물이 흐르더군요.
돈을 많이 벌어서..부모님을 1년만 모시고..효도하고 보내드리는게 나의 소망이였는데..
엉엉 울어도 나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향불을 밤새도록 꺼지게 하면 안된다고 해서..조카와 오빠들과 저의 식구들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진짜로 많이 오더군요..3남3녀에 조카들까지..배우자들도 있으니..손님들은..너무나
많이 왔습니다. 화환이 100개가 넘게 들어오고..손님들은 끝이 없게 계속 들어오는거였습니다.
이번일로 느낀건데..남편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더군요..남편의 앞으로 화환이 50개이상이 들어오고..거기 상조회에서
나혼 분이..막내사위가 뭐하는데 저렇게 손님이 많이 오냐고..해서 조금 뿌듯함은 느꼈습니다.
저는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빈소는 말하지 않았어요...서울 손님일텐데 부담스럽기도 하고..그리고..나의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친구들한테도 연락하지 않았어요. 그냥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더 컸다고 해야할까요
아무도 제게는 중요하지 않았고..아버지한테..조금만 더 잘할걸 하는 참회의 눈물만 흐르고..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충격으로 기절을 한번 해서 그런지..몸이 많이 안 좋더군요...3일째 되던날..아버지관이 나갈때도 전 쓰러질것 같아서..
아버지의 관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화장을 했습니다. 불교를 믿는 저희집인지라..어머니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화장은 부산영락공원에서 했어요..화장하러 들어갈때 마지막이라고 인사를 하다더군요. 저는 또 힘들어서 아들에게 의지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니..마음이 너무 아팠어요..가족들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하더라군요..아버지는 조금 있음
뜨거운불에 탈텐데..많이 뜨겁겠지..이런 생각만 들더군요..
식사를 시켰지만..밥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저는 밖으로 조용히 나갔는데..아들이 나를 따라오더군요.." 엄마 또 쓰러지면
의사가 안 좋다고 했다..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울라고..그만 슬퍼하라고..할아버지 잘 보내드리자.." 이렇게 위로를
하더군요..울고 있는데..오빠들도 나와서.." 힘내라고...좋게 보내드리자고.." 오빠들이 위로를 하더군요..
화장을 다했다고 수골을 가지고 왔습니다. 도저히 볼 용기가 제게는 없었습니다. 아들이 내가 쓰러질까봐..못보게 얼굴을 가리고
데리고 나오더군요..저도 할수없이 따라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탈상을 하는데 거기 수골이 있었습니다.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사진과 수골을 보니..또 쓰러질것 같아서..마지막인사도 못하고..맘속으로만 했습니다.
" 아버지..도저히 아버지 유골 못 보겠어요..잘 가시라고..저를 태어나게 해주셔서 너무나 고마웠다고..아버지..좋은데
가셔서,..행복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고.." 저는 바깥에서 탈상을 했습니다.
아버지 수골은 선산이 있는 거제도에 가서 묻혔습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주 좋은곳에..묻었다고 하더라구요.
나중에 아버지 조상들의 묘를 전부 파 헤쳐서 납골당을 만들거라고 화장을 하는게 좋다고..전부 그렇게 말을 하더군요.
아버지 가시는날..날씨가 무지 좋더군요..
우린 슬프지만..아버지는 웃으면서..가시는것 같았습니다. 49제를 지내기 위해 절로 갔습니다.
안치식을 하더군요. 절을 하고...식구들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몸이 많이 안 좋습니다. 조금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셨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텐데..입원 하루만에 돌아가셨으니..
그리고 마지막 가는 모습을 못 뵌 불효..모든게 많이 아프군요..
걱정해주신 많은 분들의 메시지..이자리를 빌어서 감사들 드립니다. 일일이 답장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명복을 빌어주신분들 덕택에 저희 아버지는 좋은곳에 묻혀서..잘 쉬고 계십니다.
지금 몸이 지치고..맘도 지치고 힘들지반..저 나름대로 회복하도록 힘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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