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이제라도 기자회견을 열고 김용철 변호사의 말이 모두 맞다고 시인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에서 기업가들에게 비자금과 뇌물 공여는 정치적 위험을 줄이는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다고, 그렇지만 이제는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선언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 회장의 발목을 잡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영권 편법 승계 부분다. 삼성은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임원 명의의 차명계좌를 동원해 천문학적인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삼성에버랜드를 중심에 놓고 순환출자 구조를 강화해 왔다. 삼성이 과거를 벗어던지려면 이 상무의 경영권 승계 역시 일정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회장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회장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만약 검찰이 이번에도 삼성의 손을 들어준다면 과거처럼 어물쩍 덮고 지나갈 수 있겠지만 검찰 역시 운신의 폭이 좁다.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국민들의 비난 여론도 거세다. 삼성의 왜곡된 지배구조는 글로벌 주식시장에서 삼성이 저평가 받는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이 회장은 더 늦기 전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을 주도해야 한다.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은 삼성생명의 계열 분리에 있다. 이를테면 삼성생명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등의 지분을 내다 팔고 삼성에버랜드가 그 지분을 사들여 제조업과 금융업 계열사를 분리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고 LG처럼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삼성생명 보험 가입자들의 돈을 끌어들여 이 회장 일가의 경영권을 강화해 왔지만 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삼성도 아마 내부적으로는 이를 준비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보험업계에서 보험지주회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을 내놓고 있는 것도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주목할 만하다.
서울신문 12월5일 19면. 생명보험협회는 최근 "보험지주회사 도입 방안 검토"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고 "보험업법에 별도의 보험지주회사 설립 근거를 만들고 금융 또는 비금융 자회사 등에 대한 규제 수위도 금융지주회사법보다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금융지주회사법에 따르면 국내 보험사는 은행을 자회사로 두는 지주회사의 설립이 불가능하고 지주회사가 자체 사업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비금융 자회사의 소유에도 제한을 받는다.
세계일보 12월5일 19면. 일부 언론은 독일과 영국을 방문해 알리안츠생명보험과 PCA생명보험 등의 보험지주회사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한국경제는 5일 <유럽 보험사들 왜 잘 나가나 봤더니>에서 "독일에서는 보험사가 은행을 소유할 수 있으며 유럽 지역에서 알리안츠와 그 자회사들은 은행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내일신문, 세계일보도 일제히 비슷한 기사를 내보냈다.
삼성은 이미 2005년부터 보험지주회사 설립을 검토해 왔다. 이 사실은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이 올해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2005년 삼성 금융 사장단 회의 문건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금융연구원 이건범 연구원의 '금융지주회사법 개정법률안' 관련 용역 보고서에 비은행 금융지주회사 내용이 포함되는 것을 1단계 목표로 한다"는 부분이다. 이 연구원은 미디어오늘과 전화통화에서 삼성의 요구가 있었지만 반영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지만 2005년 이후 보험업계에서는 보험지주회사 설립에 대한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이 보고서에는 "금융지주회사 틀이 현행 수준에서 유지된다면 삼성그룹은 금융지주회사 요건에 적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규제를 피하면서 현행 체제의 이점을 향유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삼성이 은행을 소유할 수 없다면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은행업 진출을 모색하자는 이야기다. 최근 보험업계의 보험지주회사 설립 요구 역시 삼성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삼성생명 지분 구조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지분을 7.3%, 삼성물산의 지분을 4.8%, 삼성화재의 지분을 10.0%씩 보유하고 있는 사실상 삼성그룹의 지주회사다. 이 회장 일가는 에버랜드와 삼성문화재단, 삼성공익재단 등을 통해 삼성생명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그룹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토론회에서 "이 회장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금융회사를 통해 비금융회사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금융회사는 자본에 비해 자산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의 경우 보험 가입자들의 보험료가 이 회장 일가의 경영권을 확장하는데 동원됐다.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요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 만약 삼성이 지배구조 개편을 모색한다면 필연적으로 에버랜드를 통해 삼성생명을 지배하는 구조를 단절해야 한다. 이 경우 이재용 상무는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이를테면 제조와 금융 가운데 선택을 해야 할 거라는 이야기다.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이 회장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많은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삼성생명이 보험지주회사로 전환하고 그 아래 삼성화재와 삼성카드, 삼성증권, 삼성투신운용 등을 거느리고 여기에 우리금융지주 등을 인수해 본격적인 금융그룹으로 거듭나는 구상을 세워볼 수도 있다. 삼성전자를 판 돈으로 우리금융지주를 사들인다는 이야기다. 이 시나리오는 이미 가동 중일 가능성이 크다.
삼성생명 지배구조 개편을 둘러싼 다양한 시나리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한 대안연대회의는 이 회장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설비투자 확대와 일자리 창출 등을 강제하자는 이른바 사회적 대타협을 제안하기도 했다. 장 교수의 주장은 타협의 조건이 구체적이지 않고 애초에 그런 타협은 가능하지도 않다는 회의론에 부딪혔다. 그러나 이 회장 일가가 궁지에 몰리고 있는 시점에서 장 교수의 사회적 대타협 시나리오는 여전히 흥미를 끄는 부분이 있다.
한편 진보진영에서는 한때 삼성생명을 상호회사로 전환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삼성생명을 주주들의 회사에서 보험 가입자들의 회사로 바꾸자는 이야기다. 이 회장 일가의 지분을 이 회사에 팔고 이 회장은 이 돈으로 삼성자동차 부채를 청산하거나 지주회사 전환에 필요한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삼성생명이 상호회사가 되면 무엇보다도 이 회장 일가가 보험 가입자들의 보험료를 동원해 계열사들 지분을 사들이고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악순환이 해소된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등의 지분은 이를테면 사회적 자산이 될 수도 있다. 삼성생명이 공적 소유가 되면 모든 국민들이 삼성생명에 가입하고 삼성생명을 통해 삼성전자 등 알짜배기 기업의 경영권을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협에서 보호할 수도 있다.
삼성은 그동안 금산분리 완화를 줄기차게 주문해 왔다. 만약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없었다면, 그리고 금산분리 완화를 선거 공약으로 내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삼성이 제조와 금융을 포괄하는 거대 그룹으로 거듭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재용 왕국의 건설도 무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삼성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제조와 금융을 분리해야 한다. 이 회장 또는 이 상무 입장에서 보면 둘 가운데 하나의 경영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분명한 사실은 이 회장 일가가 무엇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에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삼성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삼성생명을 어떻게든 흔들어야 한다. 이 회장과 경영진도 아마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면서도 정치권과 검찰에 뿌려둔 떡값의 효과를 여전히 신뢰하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정환 기자 black@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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